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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 청계동본당 소개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6-03-15 13: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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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2016-03-15 13:23:40

청계동본당(서울대교구)

 

 

 

한 청년에 깊게 새겨진 천주교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유학이 좌절되어 가족을 이끌고 청계동 산골로 이주한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의 이름은 ‘안태훈’.

 

그는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때, 의병을 동학군을 물리쳤다. 동학군에게서 획득한 대량의 곡식을 군량미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빌미로 잡혀 신변이 위험했다.

 

이때 종현 성당이 몇 개월간 그의 피난처가 됐다. 그 기간 동안 그의 몸와 마음에는 자연스럽게 천주교의 교리가 새겨진 것이었다.

 

1896년, 천주교회의 도움으로 군량미 문제가 해결되자 그는 교리서들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돌아왔다. 마을 전체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개종운동이 끼친 영향

1896년 말, 최소 7개 마을에서 개종 움직임이 일어났다. 안태훈은 마렴 본당 주임 빌렘 신부에게 청원했다. “청계동에 공소를 개설해 주십시오.”

 

빌렘 신부는 사람을 파견해 개종 운동의 상황을 살피게 했다. 하지만 더 큰 뜻이 있었다. 공소 개설에 필요한 사전 준비를 시켰던 것. 그는 또한 직접 청계동을 방문하여 33명의 신자에게 세례를 주었다.

한편 개종 운동의 위험을 감지하던 해주 관찰사 김가진은 일부 몰지각한 신입 교우들의 비행과 월권행위를 빙자해 1897년, 천주교 단속령을 내렸다. 이에 1898년 안태훈, 그의 동생 안태건이 체포되어 투옥되지만 곧 빌렘 신부의 노력으로 그들은 석방된다.

 

본당의 정착, 그리고 위기의 ‘해서교안’

청계동의 교세가 증가하자 빌렘 신부는 1898년, 매화동 본당에서 청계동으로 옮겨와 정착했다. 동시에 청계동 공소의 본당 승격이 이루어졌다. 예전부터 성당 건축을 위한 기금을 모아오던 신자들은 공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교세의 급격한 신장은 문제를 일으켰는데, 1901년부터 1903년까지 교회와 향촌 사회와의 갈등이 심화되어 ‘해서 교안’이 일어난 것이다.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지방 관리들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 이에 대한 교회의 강력한 반발이 그 첫 번째, 그리고 일부 몰지각한 신입 교우들의 비리 문제를 두 번째로 꼽을 수 있었다.

 

교안의 여파로 빌렘 신부는 1903년 서울에 소환됐고, 그가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8개월 뒤였다.

 

교회 상황은 예전 같지 않았다. 해서교안, 이후의 러일 전쟁과 일진회의 침투 등은 황해도 선교 활동의 앞길을 더욱 막았을 뿐이었다.

 

가라앉은 청계동의 천주교

청계동 본당의 교세가 점차 감소했다. 그리고 1910년, 성인 영세자의 배출이 멈췄다. 희망은 사라졌다. 앞날이 보이지 않았다.

 

1912년, 빌렘 신부는 결국 가능성이 보이던 ‘해주’지역으로 이동한다. 청계동 본당은 해주 본당의 관할 공소로 격하됐다.

 

그리고 1949년, 공산 정권에 의해 해주 본당이 폐쇄됐다.

청계동 공소 역시 그 운명을 함께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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