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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 서흥본당 소개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6-03-15 13:2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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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2016-03-15 13:25:49

서흥본당(서울대교구)


서흥 지방의 복음화
1856년 베르뇌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 수안 출신의 김기호 회장. 그가 서흥 두꺼비골에 거주하면서부터 서흥 지방에 복음이 전파됐다.

재령 본당의 르각 신부는 1899년, 서흥읍과 흥수원에 공소를 설정했다. 당시 신자 수는 20여 명. 서흥 지방의 교세는 점차 급증했다. 검수 본당으로 이관될 때는 무려 15개 공소에 600여 명의 신자 수를 기록한다.


위태로운 지속
하지만 검수 본당의 이기준 신부는 이곳에서 전교의 희망을 볼 수 없다 판단했다. ‘본당 이전’이 그에 맞는 답이라 생각했다.

1915년, 그는 검수 본당을 폐쇄하며 서흥으로 본당을 이전한다. 기존의 공소가 서흥 본당으로 승격됐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서흥의 신자들 사이 불화가 발생했다. 사목이 어려워졌다.

이에 1916년, 그는 다시 사리원으로 본당을 옮겨 사리원 본당을 설립한다. 서흥 본당은 공소로 격하되고 말았다.


본당 부활을 위한 신자들의 노력
서흥 본당의 위치는 격하됐지만, 그곳 신자들의 의지는
그 누구보다 강했다.

서흥 공소 회장 안희택의 종각 건립.
이천복 회장의 강당 수리.
신자 손 마리아의 제대, 감실 기증.

신자들은 각자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최선을 다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본당의 부활’에 있었다.                                                      
그 결과, 20여 년 만인 1937년, 서흥 본당의 부활을 맞이한다.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2대 주임 안학만 신부를 이어 1939년, 3대 주임 임충신 신부가 부임했다. 그러나 3년 후, 그는 곡산 본당으로 전임됐다. 그리고 주임 신부의 부재로 이어졌다.

본당의 부활을 위해 노력했던 신자들의 노력에도 불구, 서흥 본당은 사리원 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됐다.

이후의 상황은 본당의 부활을 꿈꿀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서흥 공소는 침묵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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