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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 송화본당 소개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6-03-15 13: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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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2016-03-15 13:25:25

송화본당(서울대교구)



신자들의 열망 아래 세워진 본당

‘송화 공소’의 신자들은 본당 설립을 오랜 기간 갈망해왔다.

그리고 판단했다. ‘성당 건립에 대한 계획’ 그리고 ‘그에 대한 추진’을.

곧 공소 회장을 중심으로 실행에 옮기는 그들이었다.

 

1935년, 송화면의 향교였던 기와집을 매입했다. 철거한 목재를 사용해 읍내리에 기와집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했다.

 

신자들의 간절한 열망은 그 누구보다 강했다.

그것이 반영된 것일까. 이후 송화 공소의 신자 수가 계속 증가했다.

 

그리고 1939년, ‘박우철 신부의 부임’. 마침내 ‘본당’의 자격을 갖추게 됐다.

 

비어있는 자리에 고이는 씁쓸함

하지만 본당 설립의 기쁨도 잠시, 박우철 신부가 2년 만에 전임됐다. 이어 부임한 이보환 신부 역시 부임 이듬해 평강 본당으로 전임된다.

 

본당에는 고요한 기운만이 맴돌았다.

 

본당의 기틀이 잡혀가야 할 시기였다. 주임 신부의 공석 상태는 2년 간 계속됐다. 이에 강주희 신부가 임시로 사목을 맡는다. 당시의 신자 수는 510명.

 

잔혹한 시대 잔혹한 결말

3대 주임 서기창 신부는 사제관을 신축했다. 본당의 기틀이 잡히고 발전에 대한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상황은 야속하기만 했다. 광복 이후의 공산 치하. 시대는 천주교, 그리고 무수한 신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전쟁이 발발했다. 정치 보위부로부터의 간섭은 끊이지 않았다. 성당 건물이 군사 동원부 건물로 강제 징발 당했다. 그럼에도 교인들의 의지는 굳건했다. 신자 임능익의 집에서 성무를 이어갔다.

 

그러나 1950년 9월, 정치 보위부에 끌려간 서기창 신부였다.

열흘 후 정치보위부 방공호 속에서 발견된 것은, 그의 피사체였다.

 

참으로 잔혹한 시대였다. 참으로 잔혹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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