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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 신천본당 소개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6-03-15 13:2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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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2016-03-15 13:24:41

 신천본당(서울대교구)


불안의 소용돌이
병인박해, 그 후.
매화동 본당을 거쳐 청계동 본당 관할이 된 신천 지역이었다.


“신 숭배가 웬 말이야!”
“이 지역에서 성당 짓는 건 꿈도 꾸지 마라!”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교회와 토착사회와의 마찰은 점차 더 거세지고 있었다.


신심 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입교한 자들은 월권행위를 일삼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끊이지 않았으며,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확장에 따른 충돌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치외법권이 적용되지 않는 선교사들.
그들의 도를 지나친 행동이 종종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마찰은 마찰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불안의 소용돌이 속, 그 누구도 거친 바람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신천 본당의 행보
한편, 1907년에는 신자들에 의한 일신회가 조직 됐다. ‘애국 계몽’과 ‘신교육’이 그 목적이었다. 일신학교 또한 설립되어, 청소년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상황 속 1913년, 청계동 본당 주임 빌렘 신부가 해주 본당을 설립하고 전임되며 청계동 본당이 공소로 격하됐다. 이에 신천군 내 공소들은 장연 본당, 재령 본당, 해주 본당, 은율 본당, 매화동 본당 등에서 나누어 관리하게 됐다.

그리고 1930년, 신천 공소가 드디어 본당으로 승격된다. 초대 주임은 신성우 신부였다. 성당이 건립됐다. 이어 부임한 이기준 신부에 의해 사제관이 신축되고 종탑이 세워졌다.

조심스러운 성장이었다. 1936년, 미화 유치원을 개원하여 유아 교육을 행했으며, 1941년 유치원 건물을 완공하지만 재정의 이유로 4년 후 폐원한다.


다시 찾아온 소용돌이, 그 후
한편 광복 후 1949년, 또 다른 마찰이 빚어졌으니, 공산당과의 문제였다.

1949년, 공산당의 모함으로 연행된 구천우 신부가 극적으로 탈출해 월남했다. 사리원 본당 주임 박우철 신부와 보좌 적덕표 신부가 임시로 본당 사목의 빈자리를 대신했다.

하지만, 주임 신부가 더 이상 파견되지 못했다.

그렇게 신천 본당은 소리 없이 그 존재만 기억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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