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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 장연본당 소개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6-03-15 13: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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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2016-03-15 13:24:15

장연본당(서울대교구)


황해도 사목을 위한 노력, 선두를 달리다
‘긍련회’,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려 했다.
‘인재양성학회’, 교사와 전교회장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성부 안나회’, 본당의 기혼 여신자 60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족했다.
‘상조회’, 본당 제반 사업을 위한 후원이 그 목적이었다.


그리고 조직된 ‘가톨릭 남자 청년회’와 ‘가톨릭 여자 청년회’,
청년들의 활기찬 교회 활동을 지향했다.


황해도 천주교회에서 가장 많은 신심 단체를 조직한 ‘장연 본당’이었다.
1934년, 황해도 최초의 성체 거동 행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적극적이고 모범적이었다. 언제나 앞서 나가려 했다.


장연 본당의 첫 걸음
장연 본당의 첫 시작은 속칭 두섭이로 불리는 산골 동네로부터였다.      
1897년까지 장연 지방에 존재했던 유일한 공소, ‘두섭 공소’. 1895년에는 예비 신자 15명, 세례 신자 79명에 달하는 큰 공소로 성장했다.

그의 성장은 1898년, ‘장연 본당’으로의 재출발을 다짐하게 만들었다. 초대 주임은 파이야스 신부. 본당 설정과 함께 읍내의 천주교 개종 운동이 활발했다. 첫 걸음은 나쁘지 않았다. 1899년 장연 읍내에는 예비 신자가 무려 100명에 달했다.

하지만 잠시 위기가 찾아왔다. 1901년 파이야스 신부의 전임 이후 3개월 간 장연 본당의 주임 신부는 공석 상태였던 것. 2대 주임 르 장드르 신부가 부임했으나 이미 신자 수는 대폭 감소한 상황. 게다가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으니, 르 장드르 신부는 전교회장, 복사 없이 성무를 오로지 홀로 집행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여러 어려움 아래 그는 은율 본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육 사업’을 통한 성장
이후 장연 본당은 ‘교육’을 통한 복음 전파에 힘을 쏟는다. 3대 주임 김문옥 신부는 ‘계몽’을 강조했다. 그는 1907년, 경애학교를 설립한다. 학생 수는 남녀 각각 30명, 총 60명. 관할 공소에도 학교를 설립하도록 했다. 정심학교, 장흥학교, 월산학교, 봉양학교, 명신학교, 인성학교 등이 세워졌다. 성장의 길이 열리고 있었다.

5대 주임 김명제 신부의 재임 시절, 그는 29년 동안 장연 본당 사목과 더불어 황해도 천주교회를 감독했다. 장연 본당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는 마치 교구 본부를 떠올리게 했다.


연소되는 공간, 신앙의 마지막 흔적조차도-
성장을 바라보는 이들과 성장하는 주체는 평온했다. 적어도 1945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평온할 수만은 없는 게 현실.

명문 사학으로 인정받던 경애학교가 인민학교로 국유화됐다. 수 만 평의 교회 토지가 무상 몰수당했다. 교육 사업에 힘을 쏟을 수 없게 됐다. 전교 사업도 마찬가지. 월남이 시급했다. 강주희 신부는 본당 수녀들을 평복으로 갈아 입혀 해주를 통해 월남하게 한다.

교회에 대한 박해는 점차 거세질 뿐이었다. 정치보위부의 지켜보는 눈이 매서웠다. 불안과 초조가 모든 공기를 둘러싼 가운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장연 본당을 향한 인민군의 방화’.
그렇게 타오르는 불 속에서 본당의 흔적들은 남김없이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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