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자료실

home  HOME > 자료실 > 일반자료실
제목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 매화동본당 소개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6-03-15 13:29:24
이메일
수정일
2016-03-15 13:29:24

매화동 본당(서울대교구)

 

 

      

 

‘근대식 움직임의 현장’

매화동 본당은 실질적, 체계적인 방식의 사업을 운영했다.

 

황해도 지역 최초 사학 ‘봉삼학교’.

남녀를 따로 분리해 체계적으로 가르친 근대식 교육의 현장이었다. 남자 부는 ‘교리와 학문’을, 여자부는 ‘기도문, 한글, 가사’ 등을 배웠다. 이후에는 신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교육의 취지는 ‘애국심, 도덕심 배양’에 있었다.

 

그리고 본당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것, ‘신자회’.

신자들이 직접 창설한 단체로, 회원비와 찬조 회원들의 기부금으로 조성된 기본금은 신자들의 예금 및 대출 등의 신용 금고 역할을 했던 것. 수입은 봉삼학교의 운영, 본당의 경상, 유급 전료사의 급료를 주는 데에 쓰였다. 이는 본당의 경제적 자립으로 이어졌다.

 

매화동 본당은 기존의 틀에 갇히지 않는, 그러한 성당이었다.

 

‘매화리’의 본당

이러한 매화동 본당은 1896년에 ‘마렴 본당’이라는 이름으로 최초 설립됐다. 초대 주임 발렘 신부가 초가 성당에서 축성식을 거행하고, 첫 미사를 봉헌했으며 첫영성체를 집전했다.

 

1897년, 본당이 마렴과 머내 사이 언덕 위 기와집으로 이전함에 따라 일대에 동네 ‘매화리’가 형성됐다. 이에 본당도 ‘매화동’으로 그 명칭을 바꿨다. ‘매화’는 본당 주보 ‘로사리오’의 한자 표기이기도 했다.

 

매화동 본당, 그리고 우도 신부

매화동 본당과 일생을 함께 한 신부가 있었으니, 1898년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우도 신부이다. 그는 부임 직후 200여 명의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줬다.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농민들의 현실을 가슴아파했다. 토지를 매입한 후 그들에게 소작을 줬다. 이는 전교 활동 활성화에 보탬이 됐다. 1899년 한 해 동안만 500여 명의 영세자를 배출한 그였다.

 

그는 ‘교육’에도 열을 올려, 황해도 지역 최초 사학인 봉삼학교를 설립했다. 봉삼학교는 1907년, 근대 교육 시설을 갖춘 초등교육 기관으로 정식 설립됐으며 그로부터 2년 후 사립학교 인가를 받았다.

 

우도 신부는 사목과 교육에 도움 받을 수녀들이 필요성을 인식했다. 이에 뮈텔 주교에게 보고한다. 1909년, 두 명의 수녀가 본당에 도착. 본당 내에 수녀원 분원이 개설됐다.

 

1912년, 여자부는 ‘누에치기와 명주실’을 뽑는 일을 실험적으로 실시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이에 양잠 강습소를 개설, 기술을 널리 보급시켰다. 이는 주민들의 소득 증대에까지 이어졌다.

 

우도 신부의 노력은 15년 간 계속됐다. 그리고 1913년, 그는 매화동 본당 내에 묻힌다.

 

본당의 끊임없는 성장

3년 후, 본당 신자들은 우도 신부가 계획했던 성당의 정문을 건립한 후 ‘숭상문’이라 명명했다. 1920년 초 매화동 본당 관할 구역은 안악군과 신천군 일대 9개 공소에 다다랐으며, 신자 수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매화동 본당에선 봉삼유치원 개원, 가톨릭 여자 청년회 창설, 소화시약소 개설 등이 이루어진다.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봉삼학교는 5대 주임 신인균 신부의 적극적인 대처에 의해 다행히 위기를 극복했다. 뿐만 아니라 학생 수가 500여 명으로 증가했으며, 6년제로 개편됐다. 1935년에는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지역의 신부 10명과 신자 2,000명이 참가한 성체 거동 행사를 매화동 본당에서 거행하기도 했다.

 

어두운 현실, 마지막

이후 1937년, 7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여구 신부 역시 13년간 본당의 발전을 위해 무수히 노력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일제 말기, 공산 치하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1950년, 이여구 신부가 공산군에게 납치됐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목록





이전글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 장련본당 소개
다음글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 사창본당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