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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 장련본당 소개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6-03-15 13:2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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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2016-03-15 13:28:56

장련 본당(서울대교구)

 

 

      

장련, ‘공소’의 역사

장련 지방의 천주교는 대부분 ‘공소’에서 이루어졌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푸아넬 신부로부터 금복리에 첫 공소가 세워졌다. 이어 쿠데르 신부, 로 신부가 장련의 복음 전파를 위해 노력했다.

 

로 신부는 금복리를 포교의 거점으로 잡았다. 장장 1년 6개월 동안 그는 50여 명에게 성사를 주었다. 또한 구월산 주위에 4개의 교우촌을 형성했다.

 

그러나 1891년, 장련 교우촌이 해체되며 고정리 공소만이 남게 됐다. 이후 장련 지방은 몇 번이나 그 소속이 바뀌었다. 불안정한 소속 아래 최종적으로 은율 본당 관할이 됐다.

 

신부가 따로 담당하지 않았던 ‘공소’.

하지만 공소의 신자들은 누구보다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이에 1937년에는 신자 수 250여 명, 예비신자 수 30여 명에 이르렀다.

 

신자들의 대비

신자들이 나섰다. 그들은 공소가 장차 본당으로 승격될 것을 예감했다. 대비가 필요했다. 그들은 직접 행동에 옮겼다.

 

“성당으로 사용할 새 공소가 필요합니다.”

1937년 여름, 공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해 말, 89평 규모의 3층 연와조 건물이 세워졌다.

 

예감이 들어맞았다. 1939년,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됐다. 초대 주임으로 안학만 신부가 부임했다.

 

멈춰버린 성장

안타까운 사실이 있었으니, 안학만 신부는 만주 지역에서 총상을 입어 몸이 불편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아픈 몸에도 불구, 적극적인 사목 활동을 벌인다.

 

그는 ‘청소년 사목’에 특히 주력했다. 청소년은 곧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들이었다. 안 신부는 본당 가톨릭 청소년단을 재정비 했다. 그에 의해 새롭게 내려진 이름은 ‘돈 보스코 청소년단’.

 

본당의 기틀이 잡혀가는 듯 했다. 그러나 성장은 멈추었다. 침체기를 맞이했다. 1942년, 안학만 신부가 전임된 후 후임 신부가 더 이상 부임하지 않았다. 이는 ‘은율 본당 관할 공소로의 격하’로 이어졌다.

 

마지막 신부

1948년, 신윤철 신부의 부임과 함께 공소는 다시 본당으로 승격됐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가 장련 본당의 마지막 신부가 될 것이라는 것을.

 

1950년 6월 24일 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이었다.

신윤철 신부가 장련 내무서로 강제 연행됐다.

 

‘큰 자루 속에 넣어져 해주 수양산으로 끌려갔다더라.’

‘신부님께서 살해당하신 겁니다.’

끔찍한 소식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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