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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 사리원본당 소개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6-03-15 13: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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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2016-03-15 13:28:24

사리원 본당(서울대교구)

 

순교자의 지역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아픔의 고통만이 남았다.

평산 출신의 ‘고광성’과 그의 딸 ‘고순이’. 그리고 봉산 출신의 ‘황 포수’.

 

일찍부터 순교자를 배출한 봉산군과 평산군 지역이었다.

이곳은 사리원 본당 관할로, 사리원 공소가 설립된 것은 1897년.

 

그리고 1901년, 이종국 신부가 검수 본당을 설립하며 사리원 공소는 검수 본당의 관할이 됐다. 당시 교세는 신자 90여 명, 예비 신자 500여 명이었다.

 

검수 본당 4대 주임 이기준 신부는 1915년, 신자들의 요청에 따라 서흥으로 본당을 이전했다. 그러나 신자들 사이 불화가 있어 그 해 사리원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사리원 본당의 시작, 이어지는 위태로움

이기준 신부의 사리원 정착을 계기로 사리원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됐다.

 

1920년 이루어진 ‘경편 철도의 부설’.

사리원은 교통의 요지가 됐다.

 

그러나 1년 후, 많은 신자들이 생활고를 겪었다.

그들은 평양, 진남포 등 타 지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교세가 크게 위축됐다.

 

미래를 바라보는 신부

그러나 희망마저 주저앉은 것은 아니었다. 1936년, 황해도 감목 대리직이었던 김명제 신부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하며 사리원 본당은 황해도 교회의 중심지로 변모했던 것.

 

김 신부는 황해도가 독립 교구로 승격될 것을 생각했다. 그는 곧 사리원에 신축 중인 고딕 양식의 2층 벽돌 성당을 훗날의 주교좌 성당으로 설계했다. 아울러 사제관과 수녀원까지 건립했다. 그의 시선은 모름지기 먼 곳을 향해 있던 것이었다.

 

또한 그는 교육 사업에도 애정을 가졌다. 1937년, 봉화유치원을 개원했으며 이어 4년제 여자 초등학교인 명성학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1942년, 서울 대목구장 노기남 주교가 황해도 감목 대리구를 폐지함에 따라 김 신부는 자동 해임되어 원주 본당으로 전임된다.

 

신부의 희생과 함께한 마지막 인사

1946년, 주임 박우철 신부의 보좌로 전덕표 신부가 부임했다. 그는 연로한 주임 신부를 대신해 본당 사목을 도맡다시피 했다. 79위 복자반 학생회, 소화 데레사회, 예수 성심 청년회, 성모 성심 부인회, 요셉 노년회 등 여러 단체를 조직했다.

 

평안도, 함경도에서 남하하는 신자들이 많았다. 사리원 본당은 그들의 주요 경유지였다. 전 신부는 신자들의 월남을 적극 도왔다.

 

끝까지 본당을 지키던 전 신부였다.

 

그러나 사리원 시내에 폭격이 한창이던 1950년의 가을 어느 날 다가온 ‘전 신부의 행방불명’. 그는 더 이상 이승에서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암울한 분위기 속 11월, 박우철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남하했다.

사리원 본당과도 작별의 인사를 고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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