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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 안악본당 소개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6-03-15 13: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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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2016-03-15 13:27:25

안악본당(서울대교구)


애국지사의 배출지, ‘안악’

안악 지역 첫 복음화가 시작된 것은 1880년대 말. 신자 수가 점차 증가하자 우도 신부는 1899년 안악읍 공소를 설립했다. 당시 신자 수는 53명, 예비 신자는 45명.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안악은 황해도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많은 애국지사가 배출됐다.

 

안중군의 사촌 안명근이 안악에 들어왔다. 의병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안악105인사건’에 관련되어 체포된다. 이는 일본 측에 의해 철저히 날조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포함, 많은 이들이 함께 검거됐다. 그들은 ‘신자’였다. 아픔만이 남았다.

 

안악 본당의 설립

시간이 흘러 1936년, 양덕환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안악읍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됐다. 이듬해 김명제 신부, 그리고 여러 교우들의 성금으로 일자형의 한식 성당과 사제관이 신축될 수 있었다.

 

양 신부는 풍수원 본당의 신 가타리나를 전교 회장으로 초빙했다. 윤계진 회장도 예비 신자 교리반을 직접 지도했으며, 미신자 가정을 방문하는 등 사목의 노력이 계속됐다. 교세 확장을 기대했다.

 

전쟁과 함께 사라져간 본당

광복, 그 1년 뒤 김경민 신부가 부임했다. 공산 정권의 탄압이 가중되어 사목 활동에 무리가 많았다. 김 신부는 포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본당에 남아있던 그는 1950년, 공산당국에 검거됐다. 6.25 전쟁이 일어나던 날 새벽이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그 뒤로 영영 볼 수 없었다.

 

이후 공산정권의 눈을 피해 숨어있던 사창 본당의 김충무 신부가 안악 성당의 목자역할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해 겨울, 서울 피난길에 올랐다. 안악 성당의 모습도 잊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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