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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 은율본당 소개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6-03-15 13:2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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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2016-03-15 13:26:55

은율본당(서울대교구)



은율 공소의 전화위복

많은 외교인 주민들은 천주교와 서양인 선교사들에 적의를 품었다. 주민들의 멸시로 인해 은율 공소는 여러 차례 문을 닫을 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황해도에서 활발히 일어난 개종 운동의 결과로 은율 지방에 성인 영세자 13명이 배출됐다. 위기를 넘긴 은율 공소는 도리어 장연 본당 공소 가운데 가장 많은 신자수를 자랑했다.

 

이에 은율 공소는 1902년, 장연 본당에서 분리돼 본당으로 승격. 초대 주임으로 르 장드르 신부가 부임했다.

 

신부들의 노력_ 은율 본당의 성장

초반의 본당은 미약했다. 르 장드르 신부를 이어 1902년 멜리장 신부가 부임했으나, 재령 본당으로 전임되는 끝에 은율 본당의 담당 신부는 공석 상태였다. 이는 곧 ‘공소로의 격하’로 이어졌다.

 

하지만 1914년, 윤예원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본당으로 재승격 되었으며, 교세 역시 증가했다. 밝은 앞날을 기대했다. 이어 새 본당의 설립이 대두됐다. 1918년 공사에 착수하여 그 해 8월에 완공. 이후 담당 신부들의 본당 성장을 도모한 노력은 계속 되었다.

 

성모 유치원을 개원했으며, 여러 단체들을 조직해 본당의 활성화를 꾀했다. 1929년에는 해성 야학원을 개원했다. 다만 낡은 성당이 문제였다. 6대 주임 이순성 신부는 성당 보수 공사에 자비를 들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후 본당에서는 피정 지도 신부를 초청해 신자들을 재교육하기도 했다. 또한 일반인들을 위해 종교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러한 신부들의 노력 끝에 교세가 확장됐다. 그 결과 1939년, 장련 공소의분리, 본당으로의 승격이 이루어진다.

 

침묵 속으로

하지만 위기의 상황이 다가왔다. 광복 후 공산 정권의 교회 탄압이 거세졌다. 본당 수녀들이 철수했다. 신자들은 월남을 시도했다.

 

그리고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되기 전날, 윤의병 신부가 정치 보위부에 연행됐다. 이후 ‘행방불명’.

 

은율 본당은 침묵의 길을 걷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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