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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 재령본당 소개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6-03-15 13: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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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2016-03-15 13:26:24

재령본당(서울대교구)


황해도 중앙 평야 지대에 걸던 기대

1890년대 천주교 개종 운동이 활발했다. 교회를 향한 ‘편견’은 사라져 가고 있었다. 르 장드르 신부는 황해도 중앙 평야 지대에 선교의 거점을 확보했다. 그렇게 설정된 재령 공소는 1898년, 예비자의 수가 무려 400명에 달했다.

 

1899년, 재령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됐다. 초대 주임으로 르 각 신부가 부임했다. 그는 모성학교의 모체가 되는 성당 부설 초등학교를 개설했다. 그리고 곳곳에 공소를 설립했다.

 

외줄타기 운영

어느 날, 정부에서 ‘이응익’이란 이가 조사를 나왔다. 신자와 관민 사이에 있던 충돌 사태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불운의 시작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수많은 이들이 고개를 돌리고 떠나갔다.

 

교세는 약화되어 갔다. 2대 주임 멜리장 신부는 침체를 타개하고자 했다. 1909년, 그는 40여 명을 모아 야학을 시작한다. 초등학교 수업을 시작했다. 학교인가도 받았다. ‘모성학교’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운영 자금이 부족했다. 또한 학생들의 관립 학교로의 입학과 전학을 무시 못했다. 학생 수는 줄어갔다. 결국 1918년, 폐교의 길에 들어섰다.

 

멜리장 신부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대한의 노력을 했다. 성당 경내에 뽕나무와 사과나무를 심었다. 학생들에게 양잠 기술을 가르친 것이다.

 

아슬아슬했다. 본당의 안정화를 고대할 뿐이었다.

 

위기와 회복의 반복

재정적인 어려움은 계속 됐다. 3대 주임 신성우 신부는 유치원의 성격을 지닌 동명학원을 개설했다. 1923년에는 성당 종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7년, 동명학원이 폐원된다. 이후 그는 야학을 개설,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본당 부녀자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노력은 계속됐다. 그래서였을까. 청년회와 소녀회와 같은 단체들이 태동했고, 침체된 교세가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시 찾아온 위기. 1930년, 신 신부의 신천 본당으로의 전임. 재령 본당에 남겨진 것은 주임 신부의 공석 상태였다. 이는 공소 격하로 이어졌다. 다행히 3년 후 방유룡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본당으로 재승격 되지만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방 신부는 ‘젊은 교회’를 꿈꿨다. 유교적 폐습으로 생긴 것들을 타파해 나갔다. 성당 내부 남·녀 좌석 사이 칸막이를 없애고 성당 좌우 양쪽을 증축했다. 본당 청년들과 합심해 생동감 넘치는 교회로 만드는 데 열정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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